름 내내 여름답지 않은 기온이 계속되어 올 여름은 편안하게 지나가나 싶었다. 예년 같으면 냉방기도 모자라 방마다 선풍기를 돌리고서도 뜨거운 햇살을 식히지 못했는데, 올해는 선풍기도 돌려보지 못하고 여름이 다 지나가고 있으니 말이다. 오히려 저녁 나절에는 조금 선선하기까지 했다. 아주 짦은 여름이 스쳐 지나가고, 가을이 훅 들어오는 줄 알았다, 추석 바로 다음 주까지만 해도. 그런데 갑자기 날이더워지더니, 이젠 가을이 와야 할 때인데도 한여름을 방불케 한다. 이러기를 벌써 몇 주 째다. 더위를 좀 잊어보려고 다녀온 지난 달의 여행이 무색하다. 지금도 밖은 시원한데 집 안은 낮 내 덥혀진 건물 탓에 선풍기를 돌리고 있다.  

 


여행은 항상 가슴이 설렌다. 가고 오는 길의 경치를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뻥 뚫린다.


가을 여행지를 물색하다가, 지난 달 다녀온 섬 아닌 섬 'Island in the Sky'에 다녀온 일이 생각났다. 틈틈이 여행을 정리하고 있는데, 지난 번 여행은 차일 피일 하다가 아직 정리를 못했다. 여행을 하다보면 여행 자체가 주는 유익함이나 즐거움도 있지만,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즐거움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여행이었다. 여행을 하는 동안 '여행이란 무엇일까?', '왜 나는 여행을 다니고 있을까? ' 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많은 이들이 여행을 권장하고, 많이들 다니기도 한다. 그들이 모두 나와 같은 생각으로 여행을 다니는 것은 아니겠지만, 대체로 다음 몇 가지 이유로 여행을 다니고 있지 않을까? 뻔한 이야기 일 수도 있지만 정리해 보았다. 



 

드넓은 벌판, 곧게 뻗은 도로, 그리고 먼 발치에 보이는 생경한 모양의 바위 산들...닿는 발걸음 어디든지 즐겁기 이를 데 없다. 


번째는 '어디를 갈까?' 고민하면서 얻는 즐거움이 있다.  

요즘은 인터넷으로 거의 모든 것을 알아 볼 수 있으니, 주로 인터넷을 통해 여행지를 물색한다. 사진도 찾아보고, 여행지에 대한 다른 사람의 여행기, 후기 등도 두루두루 살펴보는 동안 기대가 점점 자라난다. 그러면서 여행 경로를 잡고, 사진은 어디서 어떻게 찍고, 동영상은 또 어떻게 찍으면 좋을 지, 어떻게 하면 정해진 시간에 더 풍부한 경험을 할 수 있을 지 등등을 생각하는 데, 이러는 과정이 여간 즐겁지 않다.  출발 일자를 정하고 필요한 것들 예약하고 나면, 여행을 출발할 때까지, 기간이 길든 짧든, 여행에 대한 기대감으로 일상이 덜 힘들어지고, 견딜 만해진다.  때로는 이런 기대감이 일상을 견인할 때도 있다. 


미래에 대한 기대가 살아있는 삶을 산다는 것의 의미는 참으로 소중하다. 그러나 현실은 작은 기대 조차도 사치로 여기게 하니, 어쩔 것인가? 그렇다고 현실이 주는 중압감에 소중하게 주어지는 매일의 삶을 가볍게 여기거나, 무의미한 것들에 시간을 낭비하면서 살 수는 없지 않은? 이럴 때 여행은 현실은 견뎌내는 힘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소중한 경험이 아닐까 싶다. 
 




가까이 다가가 쳐다보는 저 바위 산, 마치 인공의 조형물처럼 오묘한 자태를 하고있다. 


번째는 여행하면서 얻는 즐거움이 있다. 

운전하면서, 걸으면서, 때로는 머물러 살피면서 그 동안 알지 못했던 하늘과 바다와 나무와 돌들, 그리고 조용히 또 때로는 성난듯이 흐르는 물, 무엇 보다도 그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것들과 만나는 시간이다. 


비단 내가 속한 인간이라는 종은 물론이려니와, 이 지구 별에 함께 모여있는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모든 존재들, 그들이 어울려 그곳에서 살아가는 방식이 내가 이곳에서 치열하게 전쟁하듯 살아가는 방식과 보기에는 다를 수 있지만, 결국은 같은 것은 아닐까? 그래서 나도 그들의 일부이지 않을까? 거꾸로 그들도 이미 내 삶에 가까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지금 머무는 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은, 비단 나하고만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그 주변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것들과도 깊숙한 관계가 있을 수도 있다. 결국 내가 오늘에 온 힘을 기우리는 것이, 좀 거창하게 말하면 우주적인 삶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까지 미칠 때, 나는 더할 나위 없이 즐겁다. 
 




황무지에 돋아난 야트막한 저 생명들도, 비록 눈에 띄지는 않지만 바위 틈 사이를 비집고 머리를 내민 이름 모를 들풀들도 모두 반갑다.


번째, 되새기는 즐거움이 있다. 

처음 며칠이야 여독으로 힘들다가도, 그 며칠을 지내고 나면 여행하면서 겪은 일들을 기억하고 추억하면서 번잡하고 고된 일상을 이겨낼 수 있다. 때로는 사진을 정리 하면서, 또 때로는 동영상을 편집하면서 그리고 당연하게도 글로 정리하면서 다녀온 여행을 되새긴다. 


이 기억의 줄거리들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고대하며 기다리며 얻는 힘과는 또 다른 힘을 주기도한다. 인간의 뇌는 시간이 지날수록 저장해 놓은 데이터를 재생해 내는 데 시간이 늘어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므로 일상의 무게가 점점 무거워 질 무렵이면 기억의 편린들도 점점 희미해 지게 마련이다. 사는 게 힘들고 지쳐갈 무렵 지난 번 다녀온 여행의 기록을 뒤적거려본다. 동영상을 보면서, 사진을 보면서 그 날 그곳에서 느꼈을 느낌들을 부활시켜 재생해 본다. 그러면 그 추억 과 경험이 불러일으키는 오묘한 기운과  힘이 오늘 겪은 전쟁의 참화를 달래고 어루만져 일상으로 복귀하기 좋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게 해 준다. 


그 뿐이 아니다. 즐거웠던 시간, 그 시간에 느꼈던 정서적 반응들, 감각적인 반응들이 나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나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건 현장에서 했던 경험들과는 또 다른 경험이다. 이런 경험들이 내 삶의 일부를 형성하고, 생각의 단초를 주기도 하며, 또 때로는 여기서 새로운 영감을 얻기도 한다.  

 




따로 구도를 잡지 않아도 너무 멋지게 서있는 저 바위산과 키작은 나무들, 카메라를 들이대는 곳 마다 그저 감탄이 절로난다. 


이렇게 정리를 하고 보니 그동안 내가 왜 정신 없이 여행을 다니려고 했는 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한 번의 여행으로 평생 동안 즐거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제 아무리 한 번의 여행을 놓고 그 즐거움을 중복적으로 누릴 수 있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니 앞선 여행이 주는 삶의 기력이 덜해질 무렵이 되면 또 다시 길을 떠날 채비를 하는가 보다.  



<160820 T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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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만 생각할 수 있다고, 

그렇게 말하지는 마세요.
나무와 바위, 작은 새들조차 

세상을 느낄 수 있어요. 
자기와 다른 모습이라고, 

무시하려고 하지 말아요.
그대 마음의 문을 활짝 열면, 

온 세상이 아름답게 보여요. 
 
서로 다른 피부색을 지녔다 해도,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죠.
바람이 보여주는 빛을 볼 수 있는 

바로 그런 눈이 필요한 거죠.
아름다운 빛의 세상을 함께 본다면,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있어요.            


-포카혼타스 '바람의 빛깔'에서 발췌-



Silver Lake Loop in Eastern Sierra



을에 떠나는 길은 늘 설렘이 가득하다. 여름 내내 더위와 싸우느라 지치기도 했고, 때가 바뀌면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과 그 바람결에 뭍어오는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미묘한 기운 탓이다. 사람들은 이 미묘한 기운을 '가을을 탄다'고 말하기도 하는 것 같다. 실은 나도 그런 쪽에 가깝다. 마음 한 쪽이 휑하기도 하고, 왠지 살아가는 느낌이 덜해지기도 하는 것이 덧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예년 같으면 '가을'일랑 일상에 뭍어 버리고, 값싼 감상에 젖지 않으려고 애를 쓰기도 했다. 그럴수록 가슴은 시리기만 했고... 그런데 이렇게 길을 나서고 보니, 너무 좋지 않은가! 이따금씩 시려오는 가슴은 떠난 길에서 얻은 즐겁고 유쾌한 느낌으로 달랠 수가 있으니 말이다.  






햇살 가득한 숲 길을 걸으며 빨강, 노랑으로 물든 나뭇잎과 그 사이를 비집고 파고드는 빛의 향연을 보노라면, 눈이 부셔서 눈물이 절로 난다. 이런 느낌이 좋다. 작은 냇가 그늘진 터에 놓인 소박한 의자에 앉아 따스한 가을을 맞으며, 바람결에 일렁이는 물결, 반짝이는 수면 위로 살짝 단풍잎 하나 떠 가는 그림 같은 풍경이 있다. 



North Lake in Bishop Creek


때로는 옅은 물안개로 둘러싸인 수초와 그 가운데 고즈넉히 서 있는 외로운 나무 한 그루, 사람들로 번잡하지 않아 더욱 좋은 외진 시골의 호숫가,  호수를 끼고 서 있는 사시나뭇잎이 노랑으로 물들어 바람결에 살랑이고, 수면에 비친 사시나무의 행렬이 장관을 이룰 때면 가슴이 벅차 오른다.  






작은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이름 모를 꽃 한 송이, 그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수 많은 생명들. 길을 떠나 떠도는 어느 곳에서도 마주하는 이 생명들의 어우러짐이 내가 살아가는 터가되고, 그들이 자라나는 대지가 된다.


Lake Sabrina in Aspendell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을 '우리'에 포함시키지 않고, 다스리거나 이용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즐길 거리 정도로 치부하고는 한다. 때로는 파괴하고 배제하고 소외 시키기도 하면서 같이 어울려 살아가야 할 '우리'로 생각하지 않는다. 하기야 사람들 끼리도 그저 다를 뿐인 데, 억압하고 차별하는 것이 여전한 것을 보면 이 정도의 기대 조차도 버겁다. 


좀 일찍 떠난 길이라서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기대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깨달았다. 이제 좀 덜 시린 가슴으로 가을을 날 수 있을 것 같다.  
 
다음에 떠날 길을 기대하며.   



<161001 T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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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에서

2017. 1. 19. 15:28 from 길을 떠나다


Merced River in Yosemite National Park



강가에 앉아 잠깐 조는 틈에 

문득 맑은 강물이 눈에 들어온다. 
높푸른 가을 하늘을 담아서 그런지 
유난히도 파랗게 보이는 수북한 이끼들,
그만큼 오랫동안 그곳을 지켜왔겠지.

그들 사이를 여유롭게 헤엄치는 피라미,
수면에 비친 한가한 수초,
파란 하늘을 시기하듯 떠가는 새하얀 구름,
수면 위를 살짝 스치는 한가한 바람. 

속세는 하릴없이 시끄러운데,

어쩌라고 이렇게 평화로운가?



<161027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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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ion National Park, Utah

여행을 다니다 보면 번잡한 관광지 보다는 한적하지만, 볼 것도 많고 배울 것도 있는 곳을 더 선호하게 된다. 물론 사람이 많아 서로 부딪히며 그들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고 느끼려는 사람들고 있겠고. 사람마다 다양한 성향을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또 다른 경우가 있기도 하다. 

자이온 국립공원은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인데, 공교롭게도 두 번 다 겨울에 다녀왔다. 2016년 2월에 다녀오고 그 해 말일에 갔으니, 한 해의 시작과 끝을 자이온에서 보낸 셈이다. 뭐, 그럴만한 까닭이 있는 것은 아니고, 공교롭게 그리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주로 여름과 가을에 집중해서 다녀온다. 그 만큼 볼 것이 많고, 할 것도 많고, 즐길 거리도 많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실제로 여름의 자이온은 트래킹과 캐년니어링의 천국이라고 할 만큼 다양한 트레일이 개발되어 있다. 게다가 주변과 연계하여 짧은 트레일부터 장기간의 트레일까지 원하는 대로 즐길 수 있다. 또한 가을의 자이온은 또 어떤가! 눈부실 정도로 화려하게 물든 단풍이 보여주는 그 아찔할 정도의 풍경들은 실로 말로 표현 할 수 조차 없다.  

그 반면에 자이온의 겨울은 오묘하다. 해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그들이 보여주는 풍경은 신묘막측-달리 표현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하다. 잎이 다 진 앙상한 단풍나무(사실은 사시나무)들이 햇빛을 받으면 그 가지들이 영롱하게 반짝거린다. 단풍 든 잎이 무성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다. 그러나 햇빛이 나지 않은 날이라도 그들은 소슬하기도 하고, 한적해 보이기도 하고, 쓸쓸해 보이기도 한다. 게다가 살포시 내린 눈 덮인 냇가, 산 봉우리에 걸친 운무, 귓볼이 살짝 시릴 정도로 부는 시원한 바람,  속세를 벗어나 별천지에 들어온 느낌이다.  

눈 때문에 높이 오르지는 못해도, 너무 시리도록 차가워 물길을 따라 걸을 수는 없어도, 얼어붙은 바위와 미끄러운 길을 따라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지는 못해도, 갈 때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자이온 캐년 국립공원은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은 자이온 만이 아니라, 자연이 다 그런 것 같다. 그곳에서 우리가 자연에 해꼬지를 하지 않으면, 그들은 언제나 우리를 반기고 자신을 살포시 드러낸다. 


겨울이 깊어가고 있다. 비록 눈이 없을 수도 있고, 구름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겨울에 길을 떠날 만한 것은 여름과 가을의 떠들썩한 풍경이 잦아들고 이제 좀 조용히, 그리고 조금은 외로이 길을 걸을 수 있기 때문이다. 



<161231 T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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